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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유럽여행-8] 내가 여행한 5개나라 '한 가족같은 느낌'

크루즈 출항지인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방문지인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이곳은 프랑스의 두 번째 대도시이자 프랑스 최대 무역항이다. 추운 겨울이 없고, 일년 내내 햇볕이 내리쬐는 곳으로 세잔느, 바로크, 마르체 등 유명 화가들이 활동한 도시다. 박물관, 극장, 오페라 극장도 많은 고장이다. 하지만 내 주된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산 정상에 있는 노트르담 데 가르데(수호의 성모마리아)성당을 둘러보고 시내를 좀 거닐어 보자고 마음 먹었다. 프랑스어로 노트르담은 ‘고귀한 여인’, 즉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프랑스 곳곳에 ‘노트르담’이 있는데 파리 노트르담 사원의 정식 명칭은 ‘파리의 노트르담’이며 마르세유에 있는 것은 ‘수호의 노트르담’이다. 나는 미니 관광버스를 타고 산 정상을 찾았다. 아름다운 해안선, 그리고 알렉산드로 뒤마의 소설 ‘몽테 크리스토 백작’의 실제 모델이 되었다는 외딴 섬 ‘이프’에 세워진 감옥, 그리고 산 정상에 건축된 거대한 성당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오후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노천 카페에서 와인 한 잔을 3유로(약 $4.50)에 사서 마시며 망중한의 시간을 즐겼다. 무료로 따라나오는 맛있는 올리브 짠지와 함께 마시는 와인 맛은 정말 별미였다. 마르세유의 일요일은 조용했다. 모든 상가, 심지어 백화점까지 문을 닫았고, 오직 관광지역과 동네 카페와 식당만 문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프랑스 파리에 도착해 지금까지 바르셀로나, 튀니시아, 말타, 시실리, 로마, 제노아, 마르세유 등 다섯 나라 8개 도시를 방문했다. 그런데 5개 국가 모두 같은 시간대일 뿐 아니라 화폐 또한 유로화 하나로 해결됐다. 비록 다섯 나라가 각각 자기 나라 말을 쓰고 있지만 세계는 이미 지구촌 가족으로 어울려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러는 유럽인들이 이렇게 뭉칠 수 있는 원동력은 ‘축구’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물론 축구도 한몫 했겠지만 그보다 먼저 ‘로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로마를 기반으로 유럽의 종교·문화적 동질감이 형성됐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나’라는 한국계 미국인을 생각해 본다. 처음 크루즈선에 탔을 때는, 나 스스로 어색했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이 어색함은 언어 때문에 시작된 것 같다. 안내 방송은 이태리어로 시작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그리고 ‘스페인어’ 순서로 나왔다. 저녁마다 3000석 규모 극장에서 마술, 노래, 춤, 무용 등 공연이 있는데 극장 진행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5개 국어였고, 그 순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만찬 때엔 더 당혹스러운 일도 있었다. 스니커 신발에 캐주얼을 입고 갔더니 모두가 웬 무뢰한이 왔나 하며 쳐다보는 듯했다. 다른 승객들은 정말 ‘선데이 베스트 드레서’랄까 정장을 입고 와서,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나는 탄식조로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아하, 미국이 세계에서 우뚝 선 것으로 생각했고, 또 미국식 생활 방식이 제일인 줄 알고 30년을 살아왔어. 그러나 이제 생각을 바꿔야 겠다. 미국도 이제 세계 가족의 하나일 뿐, 아니 잘 해야 큰 형님 정도라는 걸 깨달았어. 이제 예의를 지키고, 겸손을 배우고, 어울려 사는 것을 익혀야겠다.” 그 순간 우리와 친구가 된 중국인 폴 리 부부가 아내와 함께 무엇이 즐거운지 낄낄거리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폴 리를 보면서 어느덧 나는 다시 한국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 과거의 역사가 어떻든 또 땅덩어리나 인구면에서 당신네 중국보다야 작지만 한국은 대단한 나라야. 당신들이 그리 열광하고 즐기는 김치, 라면, TV 연속 드라마를 만드는 나라, 이 크루즈 배에 걸려 있는 3000대 정도의 삼성 TV를 만드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지. 그리고 아직 숫자는 미미해도 이곳 불란서, 이태리에서 볼 수 있는 현대자동차를 수출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야. 아마도 다음번엔 한국 조선소에서 만든 크루즈를 타게 될 걸…” “우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며, 미래를 꿈꾸는 행복한 나라 사람들이야. 그리고 어쩌면 타민족을 제일 많이 끌어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결혼도 제일 많이 하고, 미래 가장 많은 지구촌 식구를 껴안고 사는 나라가 될 거야….” 진정 이번 여행은 나로 하여금 세계 모든 나라 사람을 지구촌 한 식구로 받아들이게 한 소중한 기회였다. 동시에 내 시야와 사고의 지평을 넓혀준 보람된 시간였다. 크루즈여행을 통해 앞으로 남은 여생동안 국적ㆍ인종을 불문하고 지구촌 모든 사람과 웃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2009-12-07

[작가 이영목의 테마가 있는 유럽 여행-7] 제노아 쇼핑가 점령한 중국 상점들의 파워

시실리를 떠난 배는 다음날 아침 로마가 아닌 시비타베치아(civitavecchia)라는 항구에 도착했다. 이 항구와 로마간 거리는 볼티모어와 워싱턴 정도였다. 아침에 나는 선박회사가 마련한 버스를 이용해 로마에 가기로 했다. 선박회사 버스를 이용하면 교통체증, 사고 등으로 제 시간에 배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너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대신 한 군데라도 차분하게 감상하기로 했다. 그래서 바티칸 궁에서 가까운 산타 젤로라는 박물관을 목적지로 정했다. 나는 거기서 정말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 박물관 하나만 제대로 보려 해도 몇일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박물관에는 정말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찬송가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성서 글귀에 음표가 붙은 것 같은 성경 인쇄물이 있는가 하면 세잔느, 르노와르, 보디첼리 같은 화가들의 작품이 가득 찬 방도 있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군인들의 복식을 전시한 방도 있었다.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았고 본 것을 다 기억할 수 없는 게 정말 아쉬웠다. 오후에는 패션 거리를 구경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창 밖의 멋진 부티크 스토어를 구경하다 마음에 드는 가게가 눈에 띄면 버스에서 내렸다. 그러나 버스에서 본 가게는 찾지 못하고 다리품만 꽤나 팔았다. 결국 지친 몸에 시간도 없고 해서 쇼윈도로 대충대충 값비싼 물건들을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슬쩍 슬쩍 보기에도 값은 꽤 비쌌다. 신사용 구두가 800유로(1200달러), 핸드백이 500유로(750달러) 정도였다. 아무리 첨단 유행을 걷는 상품이라 해도 과한 듯 했다. 달러가 힘이 없는 것도 이유였지만 아무튼 살 엄두도 못낼 금액이었다. 로마 시내 구경을 마치고 크루즈로 돌아와 잠을 잔 뒤 다음날 아침 깨어보니 배는 어느덧 제노아 항에 닿아 있었다. 14층(deck) 식당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쇼핑백을 든 젊은이들이 줄을 지어 배로 돌아오고 있었다. 때마침 언제 나타났는지 나의 저녁 만찬 식구가 된 폴 리(Paul Lee)가 옆에 다가와 한마디 아는 체 한다. “저기 지금 오는 사람들이 우리 크루즈 승무원들입니다. 그들이 여기에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이곳의 물건값이 제일 싸다는 증거죠. 내 친구 이야기로는 이 제노아가 이태리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고, 이태리로 들어오는 수입품은 모두 이 항구를 통해 반입된다고 합니다. 수입품의 대부분은 중국산이랍니다.” 나는 제노아에도 볼거리가 많다고 들었지만 여기서 만큼은 쇼핑과 시내 구경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폴 리와 함께 제노아 시내로 걸어 들어갔다. 부두를 떠나 큰 빌딩들이 늘어선 거리에 들어서자 나는 그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거리 상점들 거의가 중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의류, 가죽제품, 전자제품, 신발, 잡화 완구 등등 수입상이었다. 심지어 상하이 수입(Shanghai Import) 등 한자로 상호를 쓴 간판도 즐비했다. 타이슨스 코너 메이시 백화점에서 120달러 정도에 파는 핸드백을 폴 리가 중국상점 주인과 중국어로 흥정을 해서 14유로(약 20달러)에 사오자 아내는 좋아 어쩔 줄 몰라했다. 제노아의 중국상가를 보다 문득 어제 저녁 식사 때 폴 리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중국은 새로운 실크로드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생각이 교차했다. 사실 내가 유럽을 마지막으로 찾았던 것은 3년 전이었다. 당시 유로화 대 달러화 환율은 1유로당 1.2달러였다. 달러 가치가 조금 떨어졌다 해도 그런대로 달러가 대접을 받았고, 중국의 진출은 미미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번 유럽 여행은 그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1유로당 1.5달러로 달러가치가 25%나 떨어졌고 유럽에서 중국은 자본과 상품 공급 국가로서 절대적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파리에서 만났던 한 연변 여인은 느닷없이 백화점, 선물가게에 불려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중국 손님(관광객)들이 몰려와서 싹쓸이를 하는 바람에 손님들 안내와 돈 세는 일손이 모자라 불려간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상징인 ‘루이비통’도 이제 중국에서 만든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고 이태리에서 팔리는 공산품 역시 대부분 중국산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 튀니시아에서의 해프닝이 다시 기억났다. 튀니시아 수도 튀니스 거리를 걷는데, 웬 소녀가 다가와 “니 하오(안녕하세요)”라고 하는게 아닌가. 내가 “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라고 했더니 엉터리 영어로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그랬다. 나는 유태계의 튀니시아인이다” 라며 낄낄거리고 뛰어갔다. 아프리카 튀니시아의 여학생도 중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고 21세기는 중국의 시대라는 말이 새삼 피부에 와 닿았다. <다음호에 계속>

2009-12-07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유럽여행-6] 지극히 평화스러운 '대부의 고장' 시실리

두 번째 기항지 말타섬은 총인구 40만명의 작은 나라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사실 생각하고, 살펴볼 것이 꽤 많은 곳이다. ‘말타’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어로 ‘안전한 쉼터’또는‘피난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곳 사람들의 혈통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또 그들은 자기들만의 말타어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근래 100년 넘게 영국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는 지역이다. 미국에서 간 내 입장에서는 아주 편했다. 또 관광객을 위해 무대 세트처럼 잘 정돈된 고풍스러운 구시가지, 공원같이 잘 가꿔진 환경, 관광기념상품, 특히 유리세공 등이 오밀조밀한 재미를 제공한다. 말타의 정복 역사는 꽤나 복잡하다.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비잔틴, 튀니시아에 근거를 둔 아랍, 노르만공, 아라곤, 오토만 제국, 프랑스, 영국 등이 얽히고 설켜 있다. 그중에서도 십자군과 관련된 사건이 흥미롭다.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기치를 내세운 십자군의 전진 기지는 원래 그리스 남단 로데스섬(Rhodes Island)에 있었다. 그러나 오토만제국의 세력확장으로 원래 그곳에 있었던 전진기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명으로 말타섬으로 옮겨왔다. 그리하여 말타에 영국 기사단, 프랑스 기사단, 이태리 기사단 등 여러 유럽 나라 기사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어 살게 되면서 말타의 인종적 뿌리가 복잡해졌다. 또한 오토만 투르크 이슬람 교도들의 침략에 맞서 유럽 기사단이 연합해 방어하다가 거의 절망적인 순간에 시실리 성주의 구원으로 살아남았던 절박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대로 재미있는 말타 관광을 마치고 배로 돌아와 내일 도착할 시실리에 관한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2000년 전 포에니전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40여년 전 책과 영화로 나를 매료시켰던 갓파더(대부)에서 느꼈던 시실리인들의 모습을 대할 수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어저께 그 작은 말타 섬에서 버스 타면 될 것을, 네 명이 1인당 13유로(약 20달러)씩 내고 왜 택시를 대절했느냐는 말을 들었는지라, 오늘은 우리 유람선이 정박한 메시나항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로마 유적지 타오르미나(TAORMINA)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두 소녀와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그만 시실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두 소녀의 미소 속에 곱게 자란 친절함과 순수하고, 고운 마음을 발견했다. 영화 갓파더에서 후덕하게 보였던 여주인공의 딸같은 소녀들이었다. 이들 소녀의 미소가 나로 하여금 시실리를 마냥 좋아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비록 유로화로 50전짜리 버스표였지만 지갑에서 꺼내 주면서 갈아타는 곳을 실수할까봐 손짓 몸짓으로 알려주고 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어 환송해 준 소녀들이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다. 시외버스로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 서는 곳이 너무 많고 느리다는 것을 알고서, 결국 나와 같은 생각으로 버스 정류장에 나온 독일인 크루즈 승객들과 함께 결국은 택시를 대절해 타오르미나로 갔다. 나중에 생각하니 잘한 결정이었다. 타오르미나에서 시실리 관광책을 한 권 샀다. 모두 124페이지, 그중 오늘 방문한 타오르미나와 메시나를 소개하는 내용만 모두 8페이지였다. 다시 말해 내가 가볼 엄두도 못낸 15배나 되는 안내책자의 나머지 섬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는 계산이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와서 시실리의 모든 것을 두루 살피리라는 욕심이 솟구쳤다. 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는 시실리의 매력 두가지와 와인 때문이기도 하다. 그 두 가지가 무얼까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사실을 말해야겠다. 이곳 시실리에는 100% 장담하지만 에어컨이 없다. 하기야 추우면 두꺼운 옷, 더우면 얇은 옷이야 입겠지만 좌우간 온도, 습도, 햇살이 에어컨이 필요없게 만든다. 그리고 나를 황홀하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시실리에는 수퍼마켓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혼자만의 상상의 그림을 그려보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무렵이 그림의 시간적 배경이 된다. “오늘 저녁은 문어 샐러드에 스테이크 한 조각, 그리고 디저트로 사과가 어떨까” 궁리하면서 생선가게에 들러 문어 한 마리, 푸줏간에서 안심 반 파운드, 야채가게에서 사과 한 개와 양상치 한 다발 등등을 사서 집으로 걸어가면서 집에서 담근 포도주의 맛을 상상하며 입맛을 다시는 그림 말이다. 내 머릿속에 펼쳐지는 이같은 그림으로 미뤄볼 때 시실리는 마피아의 본향이 아니라 평화와 조용함이 넘치는 그림 같은 정원이라고 하는게 맞지 않을까. 타오르미나 관광을 마치고 배로 돌아온 그날 밤 침대에서 행복했던 하루를 회상하면서 영화 갓파더의 주제곡 후렴 가사를 속으로 불러봤다. “Wine colored days warmed by the sun, deep velvet nights when we are one.” “밝은 한낮의 포도주빛 시간들은 저 하늘의 태양빛에 익어가고, 짙은 벨벳 빛깔의 밤이 되면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다음호에 계속>

2009-12-04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유럽여행-5] 과연 카르타고 후예들을 만나볼 수 있을까?

마침내 바르셀로나에서 크루즈 유람선 스플렌디다(splendida)호에 올랐다. 승객 4400명을 태울 수 있는 초대형 호화선으로, 이탈리아 해운회사 소속이다. 이번 출항에는 3600여명이 탔다고 들었다. 나중에 항구에 도착해 유적지 관광에 나서는 승객들을 기다리는 전세 버스를 보면서 계산해 보니 줄잡아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약 300명, 일본인 관광단이 200여명쯤 되어 보였다. 개개인으로 온 사람들까지 어림잡아 아시아인이 800여명은 족히 되는 듯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인은 우리 부부 뿐인 것 같았다. 크루즈 여행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저녁만찬인데 테이블 배정이 아주 흥미로웠다. 우리 부부를 포함해 Lee씨 성을 가진 커플 3쌍이 나란히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아마도 같은 성 가진 사람들을 함께 앉도록 배려한 것 같았다. 우리 부부 이외 Lee씨 성을 가진 승객들은 모두 중국계 미국인들이었다. 55세쯤 되는 이보천이란 이름의 텍사스 거주 부부, 북버지니아 출신의 30대의 이지충이란 부부였다. 이들은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김치, 김치찌게, 라면, 김, 그리고 TV드라마 등등을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유람선의 객실마다, 그리고 배 이곳 저곳 삼성 TV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승객 4400명, 승무원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배의 규모를 감안할 때 삼성 TV가 이 배에만 줄잡아 3000대는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와 기분이 좋았는데 우리의 고유 음식인 김치까지 그렇게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더더욱 신이 났다.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오니 내일 아침 도착하는 튀니시아의 날씨, 가볼 만한 명승지와 교통편 등등을 알리는 안내지가 놓여 있었다. 여기서 잠시 역사 이야기를 간단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늘날의 튀니시아에 있었던 고대 카르타고(유럽인들은 카르타제라고 부른다)는 BC 1200년~BC 800년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의 가나안 지역에 걸쳐 존재했던 국가다. 히브리어를 쓰는 무리였다고 한다. 그들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누비면서 해상무역을 했고 이곳 저곳에 거점 도시(도시국가)를 세웠다. 히브리어로 ‘상인’이란 단어가 ‘페니키아’라 페니키아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들이 세운 도시국가중 나중에 아주 강성한 나라가 된 것이 바로 ‘카르타고’인 것이다. 한편 BC 600년대에 이탈리아 반도에는 로마가 탄생한다. 트로이 전쟁에서 패한 트로이 왕자가 도망 나와 멀고 먼 항해 끝에 로마에 도착했고, 생명의 위험을 느낀 조카가 삼촌에게서 도망나와 늑대 젖을 먹고 자랐는데 그의 손자가 로마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로마는 로마 언덕의 양치기 무리들이 세운 깡패집단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잔치한다고 이웃 마을 사람들을 초대한 뒤 남자들은 다 죽이고, 여자들은 부인 삼아 가족을 이룬 흉악한 무리들이었다. 그런 배경의 출신들이었던 만큼 남의 문화와 장점을 쉽게 배우고 포용하면서 영토를 늘려나가 BC 250년경 이탈리아 중남부를 거의 통일했다. 그러고 보면 서부 지중해 지역에서 카르타고와 신흥 국가 로마의 패권싸움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시실리섬을 둘러싸고 BC 264년 시작돼 25년간 지속된 제1차 포에니 전쟁(카르타고와 로마전쟁), 그리고 20년 뒤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의 복수전으로 시작된(BC 219부터 20년동안) 제2차 포에니 전쟁, 이어 카르타고가 4년간 농성으로 버티다 망할때까지(BC 146) 모두 120여년에 걸쳐 전개된 이 전쟁은 로마가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시발점이 됐다. 이같은 역사적 현장을 내일 방문한다는 안내서였다. 다음날 아침 (밤 사이 배는 이미 튀니시아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크루즈 14층(Deck)의 부페식당에서 눈 아래 펼쳐진 튀니시아를 바라보며 아침을 먹으면서 몇해전 이집트 여행 당시를 떠올렸다. “현재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만들고 파라오(왕)를 미라로 만들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후예인가, 아니면 인근 아랍국가에서 굴러들어온 돌인가?” 나는 그때 이집트에서 원시 기독교라 할 수 있는 곱틱 기독교 신자들이 이집트의 박힌 돌인데 굴러 들어온 돌인 아랍인들이 주인 행세를 하며 곱틱 기독교인들은 소수인종으로 전락해 버려진 사람들로 취급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번 튀니시아 방문중 과연 카르타고 제국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배에서 내려 3곳을 구경하기로 했다. 전통시장인 메디나(medina), 안달루사 아랍인들이 지었다는 흰색과 푸른색(white and blue)만 있는 아름다운 마을, 그리고 소위‘카르타고의 폐허’이렇게 3곳 말이다. 홍콩에서 온 모녀와 4인승 택시를 대절해서 나섰다. 아주 고성능 카메라로 사진찍기에 바쁜 말괄량이 딸을 쫓아다니느라 바쁜 그의 어머니가 허둥대는 모습이 꽤나 재미있었다. 전통시장은 꼭 영화 007이나 인디애나 존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음흉한 분위기에 괜한 스릴을 맛볼 수 있었다. 아마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통 카르타고의 후손이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굴러먹다 들어온 아랍계통 사람들 아닌가 하는 선입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안달루사 아랍빌리지는 모든 집들이 흰색, 푸른색으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 관광거리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카르타고의 폐허’는 철책으로 막아놓아 철책 밖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규모가 대단할 것으로 짐작되는데 계속 발굴을 이유로 출입을 못하게 하니 참으로 아쉬웠다. 카르타고 대학, 한니발 병원 등등 가는 곳곳의 호텔, 상점, 은행. 하다 못해 음식점까지 카르타고와 한니발의 이름을 이용한 상품을 팔고 있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버는 형국 같았다. 끝으로 007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의 끄나풀처럼 보이는 우리 택시 운전수는 튀니시아가 리비아보다 더 개방적이고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자랑을 했다. 프랑스와의 밀접한 관계에도 큰 자부심을 가진 듯 했다. 사실 그곳의 자동차들 대부분이 프랑스제 뿌조, 씨트랭, 르노였고 돈은 달러는 안 받고 유로화만 통용됐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전통시장 메디나에서는 구경만 하고 진짜를 파는 바자로 안내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상점에서 내가 물건 흥정할 때면 자기네 말로 커미션을 챙기는 듯 했다. 하기사 저개발국가에다 아랍상인들이니 당연하리라. 그러나 30 유로 부르는 가죽 슬리퍼 같은 것을 5유로까지 깎아 놓고 나서, 최후로 다시 3유로 아니면 안 산다고 나서는 베테랑 흥정꾼인 나에게는 통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배로 돌아오면서 혼자 뇌까렸다. “그래 포에니전쟁으로부터 2000여년이나 흐른 오늘날 카르타고의 후예들을 만나 본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무리였어….”

2009-12-03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유럽여행-4] 시 전체가 가우디의 혼이 깃든 '건축예술품'

비행기 스케줄을 보니 불란서 파리에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30분, 식사제공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두 도시간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비행시간은 그래도 최소한 2시간 30분은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비행기 이륙 후 스낵 같은 것을 나눠줘 먹고 나니 어느새 비행기는 하강하고 있었다. 참으로 가까운 거리였다. 바르셀로나 공항에 내리니 현지 언어인 카달루나어, 스페인어, 영어로 된 출구 표시가 눈에 띄었다. 바르셀로나는 공업이 발달한 항구도시로 분명 스페인 제2의 도시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이상하게도 바로셀로나 주민들만의 말과 글이 있고 게다가 그것을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어는 학교에서 일주일에 2시간씩만 배운다고 하니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이유에서 바르셀로나 사람들이 무척 보수적 기질의 소유자가 아니냐고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1800년대 초 도시 성곽과 성당 등을 많이 허물면서 유럽에서 가장 먼저 과감하게 도시 정비사업을 시작한 게 바르셀로나라고 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하면 떠오르는 세계적 건축설계가‘가우디’가 있다. 그는 도시 곳곳에 그의 작품인 건축물을 지어 도시를 하나의 건축물 작품 전시장처럼 꾸며 놓았다. 계획 도시인 만큼 직선 거리를 만들면서도 그 속에서 물결 같은 곡선의 건물, 그리고 보행자를 위한 포장도로까지 곡선 무늬로 꾸몄다. 공원 속 나무 숲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람브라스 거리의 밤거리는 낙천적 사람들로 연일 붐볐다. 나는 유명한 스페인 요리 빠에야를 먹기 위해 꼬딕 지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세기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식당에 들어갔다. 빠에야는 야채와 육류, 해산물을 넣어 국물을 만들고 그것에 쌀을 넣어 밥을 볶아 내는 특이한 음식이었다. 빠에야에 포도주를 한 잔 곁들인 저녁을 마치고 나오자 이미 야시장이 서 있었다. 야시장에는 치즈, 와인부터 그림(유화)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물건들이 많았다. 다음날 관광을 하며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우선 콜럼부스 기념관 앞 선착장이었다. 수많은 배들이 멈추고 떠나는 선착장의 바닷물이 그렇게 깨끗할 수 없었다. 팔뚝 만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헤엄치고 노는데 누구 하나 낚시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평화롭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우디가 생전에 완성시키지 못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품들 역시 장관이었다. 그리고 꼬딕 성당 앞에서 벌어진 축제(?)도 인상적인 구경거리였다. 꼬딕 성당의 노바 광장에 도착하니 음악 연주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성당 앞 계단에 20여 명이 모여 금관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 꼭 모닥불 주위에 모인 것처럼 갖고 있던 소지품들을 가운데 놓고 손에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싸르디나’춤이라고 하는 ‘카다루나’의 민속춤이었다. 그들은 그 춤을 추기 위해 어느새 가벼운 흰 운동화처럼 생긴 신발을 신고 있었고, 그들의 표정은 즐거운 게 아니라 숙연하고 엄숙해 보였다. 그들의 춤에 무언가 내가 알 수 없는 역사, 또는 전통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나를 아주 기분 좋게 만든 젊은 친구를 만났다. 아이터(AITOR)라는 작은 플라맹고 댄스 무대가 있는 식당에서였다. 스페인 남부 세르비아 지방의 애절한 가사가 담긴 춤과는 달리, 이곳 바르셀로나 플라맹고는 경쾌하며 빠른 게 특징이었다. 식사를 하며 플라맹고를 구경하는 데 관광 안내를 하며 여관을 운영하는 사람이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젊은 학생을 데리고 와 내 옆에 앉았다. 그 젊은 친구는 테이블에 앉으며 “밀양 박씨입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참 별나고 싱거운 녀석이네”하고 생각했지만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그 청년으로부터 아주 신선한 젊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밀양 박씨라는 청년은 자신을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모 한의과대학 3학년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가만히 생각하니 최소한 앞으로 10년 동안은 공부하느라 고생만 할 뿐 외국에 나갈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에게는 친구와 지리산에 놀러간 것 쯤으로 알리고 몰래 돈을 마련해 (아마도 크레딧 카드를 개설했는지), 가장 값이 싼 터키 에어라인의 65만원짜리 비행기표를 사서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부모님께 타낸 돈은 10년 후쯤 갚아 드릴 요량이라고 했다. 젊은이에게 하필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는 바르셀로나 축구팀의 경기를 한 번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어제 바르셀로나가 마르오카를 3대 1로 이기는 경기를 구경했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메소포타미아’출토품을 둘러볼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20대 때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한 축구팀 경기를 직접 보려고 이곳까지 왔다는 그 엉뚱한 발상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바로 이런 게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이고 바로 그 엉뚱하고 무모한 도전을 바탕으로 김연아, 박태환, 신지애, 이효리, 비 같은 젊은이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밝은 앞날을 보는 것 같아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2009-12-02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유럽여행-3] 아! 자유분방한 예술인들의 성지 '몽 마르트'

불란서 파리가 화가들의 성지라면 그 성지의 핵심은 바로 몽 마르트의 언덕이 아닐까? 보헤미안 아티스트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몽 마르트 언덕, 분명 그곳은 자유분방한 예술인들의 성지였을 것이다. 몽 마르트 언덕에는 볼거리가 꽤 많다. 에밀 졸라, 알렉산더 두마(2세), 하인리, 하이네와 같은 작가들, 또 베를리오즈, 오펜 바하 등 작곡가, 그리고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알프시네 프레시스 같은 사람에서부터 가수, 무용가까지 총망라한 예술인들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는 몽 마르트 묘지도 그중 하나다. 그리고 언덕에서 시작해 언덕 맨 밑자락에 있는 물랑루즈 극장(1889년 건립. 캉캉춤의 시발지)에 도달하기까지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고 상점, 카페, 카바레, 극장들도 쭉 늘어서 있다. 언덕을 얼마 올라가니 화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쩐지 좀 초라하고, 활기가 없어 보였다. 왠지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가 떠오른다. 30여 년 전 재즈공연과 길거리 화가들로 낭만적 분위기를 풍기던 뉴올리언스를 찾았던 적이 있다. 당시 푸짐한 해산물에 버번 칵테일을 꽤나 마셔 가며 술집여자와 노닥거리던 기분을 잊지 못해 허리케인이 몰아치는 해 봄철 그곳을 찾았다가 완전히 변해 버린 아니, 낭만의 폐허가 된 그곳에서 맛봤던 씁쓸한 기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몽 마르트 언덕 또한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 걱정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기념품 상점, 카페, 동전 몇 푼을 바라며 길가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걸인 같은 연주자, 그리고 내 안목으로도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몇백 유로씩 하는 가격표가 붙은 상점의 그림들…. 더구나 이제는 화가들도 별로 없고 돈 받고 만화식 인물 스케치(CARTOWN)하는 사람들만 나온다는데, 오늘은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그나마 인물 스케치 그려주는 사람들도 없다고 한다. 실망스런 마음으로 몽 마르트 언덕을 내려가면서 혼자 생각했다. 이제 낭만의 몽 마르트 언덕이 아니라 파리가 직면한, 아니 전세계가 고민하고 있는 몽 마르트 산자락의 이야기를 소설로 펼쳐보는 게 이 시대의 요청이 아닌가 말이다. 몽 마르트란 ‘순교의 언덕’이란 뜻을 갖고 있다. 3세기 초 기독교가 승인되기 전 생 드니(ST. DENIS) 주교가 순교한 장소다. 그리고 예전 파리로 들어가는 개선문 모양의 아치형 문이 12개가 있었는데 이 몽 마르트 언덕 아래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 그중의 하나인 생 드니 문이 있다. 이 생 드니 문이 있는 몽 마르트 산자루의 분위기야말로 참으로 파리의 현주소를 대변해 주고 있다. 동쪽에는 대부분 불란서 식민지 출신의 불어를 쓰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합법, 불법으로 거주한다. 최근에는 그 인구가 늘어나 이곳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아랍계통 사람들을 위한 상가가 길게 펼쳐져 있다. 놀랍게도 불란서 거주자의 17%는 아랍계통이라고 한다. 처음 파리시를 지을 때 건축 기능공으로 그들을 데려왔으며 이후 알제리, 모로코 등지의 식민지로부터 많은 아랍계가 불란서로 이민온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남쪽으로 세느강에 이르기까지에는 값이 좀 싸지만 아주 유행에 민감한 부티크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젊은 여인들 틈에 꽤나 많은 창녀들이 섞여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설명을 들으니 늙고 별볼일 없는 창녀들은 파리장들이고, 젊고 예쁜 창녀들은 주로 루마니아, 항가리, 폴란드 등등 동유럽 출신이라고 했다. 내가 묵고 있는 서쪽, 이곳부터는 파리장들이 사수하는 지역이다.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지만 파리장들이 암암리에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밀려나지 않겠다며 굳건히 지키고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파리장들에게 가게 자릿세, 건물 가격을 세 배로 주겠다며 꾸준히 유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몽 마르트 언덕. 이곳이야 말로 지금 파리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다. 바로 이곳 낭만의 몽 마르트 언덕에서 인간들 간의, 사랑과 미움, 화합과 마찰, 애정과 질투가 전개되고 있다. 지금쯤은 몽 마르트 언덕을 무대로 이제 세계가 겪고 있는 고민을 그리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내가 20년만 더 젊었더라면, 나도 이곳에서 얼마 동안 살면서 이방인의 눈으로, 이방인으로 글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파리의 명물 캉캉쇼를 보기 위해 물랑루즈 극장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다음호에 계속>

2009-12-01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유럽여행-2] 사르트르씨, 당신 대물림할 지성인은 어디있나요

세느강의 시테섬 건너 서쪽에 ‘라틴 쿼터’라는 지역이 있다. 13세기경부터 소르본느 등등의 대학들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그 시절의 학자들이 대개 천주교 신부들이었고 성경을 비롯해 그들이 사용했던 글이 ‘라틴어’였기 때문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란 의미로 ‘라틴 쿼터’라고 불려지게 됐다. 라틴 쿼터 입구라 할 수 있는 생 미셀(ST. MICHEL) 전철역을 빠져 나오면 생 세르랑(ST. SELERIN) 광장이 있다. 광장 앞에 카페가 있어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며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아마 ‘소르본느’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열심히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프랑스사람들이 ‘카페 마고’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고, 또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궁금해 책을 읽는 여대생, 또 그 옆의 중년 신사에게 ‘카페 마고’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런데 하나 같이 다들 모른다고 했다. 실망한 채 앉아있는데, 여학생이 물어보았는지 카페의 웨이터가 다가와서 불어로 ‘카페 마고’ 가는 길을 설명했다. 가만 듣고 보니 소르본느 대학의 언덕길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소르본느 대학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조금 내려가니 과연 넓은 광장 코너에 ‘카페 마고’라는 사인이 보였다. 파리에는 노틀담 성당,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등, 너무나 볼 것이 많아 ‘카페 마고’는 관광 가이드들이 짜놓은 일정에는 아예 포함되지 않는다. 또 사실 그리 관광객들의 흥미를 끌만한 장소도 아니다. 나에게는 ‘카페 마고’가 파리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카페 마고’는 1910년대 오스카 와일드, 앙드레 지이드 등등 당대의 문인들이 모였던 아지트였다. 그리고 그들을 이어 초현실주의(SUR REALISTS) 문인들의 사교장소가 됐고 이어서 사르트르, 카뮈 등 실존주의의 요람으로 명성을 날렸다. 앙드레 말로가 1933년 ‘공코르(Goncourt)’ 상을 받자, 이곳에 모이던 문인들은 같은해 ‘마고의 상(Le Prix des Les Deux MAGOTS)’을 제정해 초현실주의의 상징인 레이몽 칸트를 첫번째 수상자로 선정했다. 마고의 상은 아직까지도 권위를 인정받는 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카페 마고’는 또 한번 변신한다. 표면상 평범한 카페였지만 실제로는 레지스탕의 본부가 됐다. 이곳에서는 또 유명인들의 탈출을 돕기 위한 서류 위조를 많이 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카페 마고’에서 시몬느 보봐르(Simone de Beauvoir)가 차를 마시며 글을 쓰는가 하면 헤밍웨이와 잡담하는 모습도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떠날 때부터 품어 왔던 ‘카페 마고’에 대한 나의 환상이 실망으로 변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선 노천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그다지 열띤 대화를 하거나 깊은 사색에 빠져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초점 없이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모습이었다. 날씨가 추워 카페 안으로 들어가면 다르겠거니 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간단한 샌드위치를 주문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페 이름의 원조인 중국의 마고(STATUE)가 보였고, 벽 곳곳에 유명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카페 안 모습 역시 내가 머릿속에 그려 왔던 것과는 달랐다. 배우 아랑드롱을 닮은 듯한 멋쟁이가, 누군가와 장사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고 주먹코의 영화배우 장 가방 같은 사람이 혼자서 커다란 설계도면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외 두 쌍의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60대쯤으로 보이는 일본 여인이 젊은 사람에게 무슨 강의를 하는지 책을 펴놓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화가들 같았다. 나와 동행한 아내는 피카소와 그의 여인 도라 마르(DORA MAAR) 사진이 걸린 벽 앞에 앉기를 원했으나 바로 그 아랑드롱 같은 친구를 방해할까봐 구석에 앉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앉은 의자 뒷 쪽 벽을 보니 조그만 글씨로 이름 하나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르트르’. 사르트르가 평소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속으로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금속글자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사르트르씨, 불란서를 넘어, 전세계에서, 앞으로 21세기의 철학,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삶의 가치를 정의할 수 있는 당신들의 대를 이을 지성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곳 카페 마고는 이제 떠나 버린 새들의 폐허가 된 둥지입니까?” <다음호에 계속>

2009-12-01

[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유럽여행-1] '사색'이 있는 여행지, 유럽을 가다

유럽의 역사와 여행기가 어우러진‘작가 이영묵의 테마가 있는 유럽여행’이 오늘부터 8회에 걸쳐 시리즈로 연재됩니다. 이는 작가 이영묵씨(페어팩스 거주)가 최근 지중해 연안국들을 돌면서 곳곳에 서려있는 역사와 감상들을 잔잔한 필체로 기록한 테마 여행기 입니다. 여행은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돼 스페인 바르셀로나, 튀니시아, 시실리섬, 로마를 거쳐 제노아, 마르세유로 이어집니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헤밍웨이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작가 겸 파리 특파원의 뇌리에는 젊은 시절 그의 삼촌이 던져준 충고 한마디가 깊이 박혀 있었다. “빈둥거리며 멜로드라마를 쓰든지, 아니면 끝없는 도전과 여행을 해라 (소설다운 소설을 쓰려면…)” 어린 시절 읽었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한 줄의 글은 소설 속 주인공을 사로잡은 것처럼 한평생 나의 뇌리에서도 떠나지 않았다. 역사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써먹는 단골 이야기가 있다. “만일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으로 가지 않고 서쪽으로 갔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가정이다. 그리스는 인류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이 있는 동쪽으로부터 문명을 받아들였다. 동쪽은 또 여러차례 그리스를 침략한 페르시아가 있는 곳이다. 반면 서쪽은 그들로부터 문화와 문명을 배워 가는 지역이었다. 서쪽에는 나폴리처럼 이미 그들의 식민 도시국가가 있었다. 정복이란 단어는 성립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역사에는 중요하면서도 충분히 현실성을 지닌 가정도 있다. 그중 하나는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이겼다면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하는 것이다. 이 가정이 만일 현실이었다면 오늘날 서양, 아니 세계는 우리가 지금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사실 서양 역사는 기독교 역사며 기독교 역사는 로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일 로마가 전쟁에서 졌다면 기독교는 잘했어야 유대인들이 믿는 토속 종교의 한 종파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오늘날 전 유럽, 나아가 전세계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많은 기독교 계통 건축물들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이번 크루즈 여행은 역사 순례라고 할 수 있다. BC 264년에 시작돼 100년 넘게 펼쳐졌던 카르타고와 로마의 1차 전쟁(포에니 전쟁) 현장인 시실리섬, 그리고 제2차 전쟁 때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이 대군을 끌고 진군했던 이베리아반도의 바르셀로나, 한니발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도달한 프랑스의 마르세유 지역, 그리고 다시 알프스를 건너 이탈리아의 제노바를 거쳐 로마까지 두루 항해하는 일정이다. 나는 크루즈 출발지인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기 앞서 프랑스 파리와 바르셀로나에서 2~3일씩 묵기로 하고 워싱턴의 덜레스 공항에서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프랑스 파리 나에게 파리는 다양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도시다. 중·고등학교 사춘기 시절, 아마도 영화를 통해 ‘사랑과 낭만의 도시’ 파리를 처음 대했던 것 같다. ‘물랑루즈’ ‘노틀담의 곱추’ ‘파리의 아메리카인’ ‘쉘브르의 우산’ ‘내가 본 마지막 파리’ 등등…. 프랑수아 사강이란 젊은 여류작가의 ‘슬픔이여 안녕’ 같은 신선한 사랑 이야기에 매료됐던 소년 이영묵을 생각하면 그 때가 지금도 마냥 그립다. 파리에 대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사색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행, 레지스탕, 그리고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양심의 작가로 자리매김한 앙드레 말로를 비롯한 사르트르, 까뮈 등의 철학적·사상적 작가들에 나는 매료됐다. 그리고 그들이 2차대전 중 주도적으로 펼친 소위 ‘레지스탕스’ 운동은 나를 사색의 세계로 빠지게 했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을 통해 나는 사색하고 세상을 여러 모습으로 바라봤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오늘날 프랑스의 모습에 약간의 섭섭한 마음도 갖고 있다. 사실 프랑스가 말이 2차대전 승전국이고, UN 상임이사국이지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프랑스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현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국·독일 등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미국에 적극 협조적인 데 반해 유난히 프랑스는 미국 정책에 ‘딴지’를 거는 경우가 많다. 이라크 전쟁 때가 좋은 사례다. 오죽 미국 의원들이 화가 났으면 ‘후렌치 프라이스’라는 이름의 감자튀김을 미 의회 식당에서 ‘애국 프라이스’로 바꾸기까지 했겠는가. 도대체 프랑스가 그렇게까지 미국에게 도도하게 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게 이처럼 서로 다른 세 가지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프랑스를 이번 여행을 통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궁리하던중 인심좋은 ‘에어 프랑스’의 스튜어디스가 가져다 준 포도주,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 스카치 위스키에 그만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한참 후 깨어 보니 어느덧 새벽. 비행기는 이미 파리에 도착해 있었다.

200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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